Yamauchi Toyosh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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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uchi Toyoshige (山内 豊信, 1827-1872) est un daimyo de premier plan à la fin de l'époque d'Edo du Japon. Il est aussi connu par son gō « Yōdō » (容堂). En tant que seigneur du domaine de Tosa de la région de Shikoku, il mène des réformes avec le samouraï Yoshida Tōyō. Lors de la purge d'Ansei (1858-1859), il est mis en liberté surveillée puis à la retraite. En 1862, il est nommé sanyo (参与). En 1867, il conseille le shogun Tokugawa Yoshinobu pour mener à bien le Taisei houkan (retour de l'empereur au pouv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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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内 容堂 / 山内 豊信(豊茂)(やまうち ようどう / やまうち(やまのうち) とよしげ、文政10年10月9日〈1827年11月27日〉 - 明治5年6月21日〈1872年7月26日〉)は、幕末の外様大名。土佐藩15代藩主。官位は、従四位下・土佐守・侍従、のちに従二位・権中納言まで昇進、明治時代には麝香間祗候に列し、生前位階は正二位まで昇った。死亡後は従一位を贈位された。諱は豊信。隠居後の号は容堂。土佐藩連枝の南邸山内家当主・山内豊著(12代藩主・山内豊資の弟)の長男。母は側室の平石氏。酒と女と詩を愛し、自らを好んで「鯨海酔侯(げいかいすいこう)」や「酔翁」と称した。藩政改革を断行し、幕末の四賢侯の一人として評価される一方で、尊王家でありながら佐幕派でもあり、一見中途半端な態度をとったことから、「酔えば勤皇、覚めれば佐幕」と揶揄されることが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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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uchi Toyoshige (山内 豊信, 1827–1872), also known as Yamauchi Yōdō (山内 容堂), was a Japanese daimyō in the Shikoku region in the late Edo period. He was usually referred to as “Lord Yōdō” in Western accou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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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uchi Toyoshige (山内 豊信 Yamauchi Toyoshige? Provincia de Tosa, Japón, 27 de noviembre de 1827 - 26 de julio de 1872), también conocido como Yamauchi Yōdō (山内 容堂 Yamauchi Yōdō?), fue un daimyō (señor feudal) del dominio de Tosa, durante los últimos años del período E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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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우치 요도/도요시게(일본어: 山内容堂/豊信 やまうち ようどう/とよしげ[*], 분세이 10년 음력 10월 9일(1827년 11월 27일) ~ 메이지 5년 음력 6월 21일(1872년 7월 26일))는 막말의 도자마 다이묘이다. 제15대 도사번주 로 번정 개혁에 성공해 막말사현후(賢侯)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메이지 유신 전부터 서양식 번정 개혁을 꾸준히 추진했고 원수였던 조슈번과 사쓰마번 사이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데 공이 있었으며, 대정봉환이라는 유신 최대 정치 개혁을 완수시켰다. 관위는 집안 대대로 종4위하 도사노카미 겸 시종이었는데, 통치능력과 메이지 유신의 공을 인정받아 종2위 곤주나곤까지 승진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정2위 (麝香間祗候, 자코노마시코, 유신 1등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가 서거 후 종1위에 추증됐다. 휘는 도요시게. 은거 후의 호는 요도(容堂). 그는 술, 계집과 시에 대한 애정을 곧잘 표현하며 "경해취후(鯨海酔侯)"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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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內豐信(日语:山内 豊信/やまうち とよしげ Yamauchi Toyoshige,1827年11月27日-1872年7月26日),日本幕末外樣大名,土佐藩第15代藩主,1849年1月21日至1859年2月在任。隱居後號「容堂」,因此也以山內容堂(日语:山内 容堂/やまうち ようどう Yamauchi Yōdō)之名而為人所知。在任期間施行,是「幕末四贤侯」之一。此人酷愛詩跟酒,自號鯨海醉侯(日语:鯨海酔侯/げいかいすいこう geikai suikō)。 山內容堂幼名輝衛,其父是山內豐著(第12代藩主之弟),母親則是豐著的妾平石氏。 第13代藩主與其弟、第14代藩主短時間內相繼離世,而末弟當時年僅3歲,在山內家親族及重臣商量下,土佐藩將豐惇秘密埋葬,然後以重病為由,向幕府請求讓豐惇隱居,藩主一職則決定由居於南屋敷的豐信承繼,幕府批准此一提請後,才正式於嘉永2年2月28日宣佈山內豐惇的死訊。 1859年(安政6年)2月,由于受到一条派牵连,愤而向幕府提出隐居要请,于是将藩主让与堂弟山内丰范,并以“忍堂”为号,後在藤田東湖的建議下改號「容堂」。1862年(文久2年)5月吉田东洋暗杀事件发生后,复出追查藩中的激进勤王派并重整藩政。 明治維新後,山內容堂被任命為新政府的內國事務總裁,明治2年,他因法國在日領地的事情上處理不當致使數十名法國士兵身亡,此後他以身體不適為由而獲准請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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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uchi Toyosh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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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uchi Toyosh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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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内容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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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우치 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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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uchi Toyosh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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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內容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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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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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uchi Toyoshige (山内 豊信 Yamauchi Toyoshige? Provincia de Tosa, Japón, 27 de noviembre de 1827 - 26 de julio de 1872), también conocido como Yamauchi Yōdō (山内 容堂 Yamauchi Yōdō?), fue un daimyō (señor feudal) del dominio de Tosa, durante los últimos años del período Edo. Yamauchi fue el decimoquinto daimyō del dominio de Tosa. Trabajó con Yoshida Tōyō para reformar y modernizar Tosa y Japón, además de oponerse a los tratados de la era Ansei. En 1859, fue obligado a retirarse y fue sucedido por Yamauchi Toyonori. En 1862, fue nombrado sanyo (参与). En 1867, aconsejó al shogun Tokugawa Yoshinobu llevar a cabo el Taisei Houkan (la devolución del poder al Empera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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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uchi Toyoshige (山内 豊信, 1827-1872) est un daimyo de premier plan à la fin de l'époque d'Edo du Japon. Il est aussi connu par son gō « Yōdō » (容堂). En tant que seigneur du domaine de Tosa de la région de Shikoku, il mène des réformes avec le samouraï Yoshida Tōyō. Lors de la purge d'Ansei (1858-1859), il est mis en liberté surveillée puis à la retraite. En 1862, il est nommé sanyo (参与). En 1867, il conseille le shogun Tokugawa Yoshinobu pour mener à bien le Taisei houkan (retour de l'empereur au pouv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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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内 容堂 / 山内 豊信(豊茂)(やまうち ようどう / やまうち(やまのうち) とよしげ、文政10年10月9日〈1827年11月27日〉 - 明治5年6月21日〈1872年7月26日〉)は、幕末の外様大名。土佐藩15代藩主。官位は、従四位下・土佐守・侍従、のちに従二位・権中納言まで昇進、明治時代には麝香間祗候に列し、生前位階は正二位まで昇った。死亡後は従一位を贈位された。諱は豊信。隠居後の号は容堂。土佐藩連枝の南邸山内家当主・山内豊著(12代藩主・山内豊資の弟)の長男。母は側室の平石氏。酒と女と詩を愛し、自らを好んで「鯨海酔侯(げいかいすいこう)」や「酔翁」と称した。藩政改革を断行し、幕末の四賢侯の一人として評価される一方で、尊王家でありながら佐幕派でもあり、一見中途半端な態度をとったことから、「酔えば勤皇、覚めれば佐幕」と揶揄されることが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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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uchi Toyoshige (山内 豊信, 1827–1872), also known as Yamauchi Yōdō (山内 容堂), was a Japanese daimyō in the Shikoku region in the late Edo period. He was usually referred to as “Lord Yōdō” in Western accou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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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우치 요도/도요시게(일본어: 山内容堂/豊信 やまうち ようどう/とよしげ[*], 분세이 10년 음력 10월 9일(1827년 11월 27일) ~ 메이지 5년 음력 6월 21일(1872년 7월 26일))는 막말의 도자마 다이묘이다. 제15대 도사번주 로 번정 개혁에 성공해 막말사현후(賢侯)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메이지 유신 전부터 서양식 번정 개혁을 꾸준히 추진했고 원수였던 조슈번과 사쓰마번 사이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데 공이 있었으며, 대정봉환이라는 유신 최대 정치 개혁을 완수시켰다. 관위는 집안 대대로 종4위하 도사노카미 겸 시종이었는데, 통치능력과 메이지 유신의 공을 인정받아 종2위 곤주나곤까지 승진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정2위 (麝香間祗候, 자코노마시코, 유신 1등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가 서거 후 종1위에 추증됐다. 휘는 도요시게. 은거 후의 호는 요도(容堂). 그는 술, 계집과 시에 대한 애정을 곧잘 표현하며 "경해취후(鯨海酔侯)"를 자처했다. 그는 안세이 대옥 당시 막부 개항파 이이 나오스케에게 핍박을 받아 당시 존왕양이파 사무라이들에게 인망을 얻었고 다케치 즈이잔을 통해 귀족들과도 줄을 대는 등 존양파로 생각됐으나, 존양파식 번정 개혁에 번번히 제동을 걸었으며 더욱이 이후 막부가 위압적으로 나오자 자기 번내 존양파를 일소하고 막부 편에 섰다. 당시 지사들은 그런 그를 시류에 편승하는 자로 조롱하면서 "취하면 근왕, 술깨면 좌막(막부지지자)"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도막파(존양파)와 좌막파 사이의 모호한 태도가 오히려 삿초 동맹과 대정 봉환을 완수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현재 야마우치가의 위패를 모시는 에 술대접을 든 요도의 좌상이 있는데, 좌대에 '대정봉환을 기뻐하는 야마우치 요도공(大政奉還を慶ぶ山内容堂像)'이라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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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內豐信(日语:山内 豊信/やまうち とよしげ Yamauchi Toyoshige,1827年11月27日-1872年7月26日),日本幕末外樣大名,土佐藩第15代藩主,1849年1月21日至1859年2月在任。隱居後號「容堂」,因此也以山內容堂(日语:山内 容堂/やまうち ようどう Yamauchi Yōdō)之名而為人所知。在任期間施行,是「幕末四贤侯」之一。此人酷愛詩跟酒,自號鯨海醉侯(日语:鯨海酔侯/げいかいすいこう geikai suikō)。 山內容堂幼名輝衛,其父是山內豐著(第12代藩主之弟),母親則是豐著的妾平石氏。 第13代藩主與其弟、第14代藩主短時間內相繼離世,而末弟當時年僅3歲,在山內家親族及重臣商量下,土佐藩將豐惇秘密埋葬,然後以重病為由,向幕府請求讓豐惇隱居,藩主一職則決定由居於南屋敷的豐信承繼,幕府批准此一提請後,才正式於嘉永2年2月28日宣佈山內豐惇的死訊。 1859年(安政6年)2月,由于受到一条派牵连,愤而向幕府提出隐居要请,于是将藩主让与堂弟山内丰范,并以“忍堂”为号,後在藤田東湖的建議下改號「容堂」。1862年(文久2年)5月吉田东洋暗杀事件发生后,复出追查藩中的激进勤王派并重整藩政。 1867年(庆应6年),山內容堂與家老後藤象二郎共同向幕府的最後一代將軍德川慶喜提議大政奉還,將政權和平移交給天皇,同时也在家臣斡旋下同长州·萨摩秘密结盟。再加上之前的四賢侯身份,使其成為幕府末年的多位關鍵人物之一。 明治維新後,山內容堂被任命為新政府的內國事務總裁,明治2年,他因法國在日領地的事情上處理不當致使數十名法國士兵身亡,此後他以身體不適為由而獲准請辭。 由於山內容堂對王政復古此事有功,被冊封為權中納言,享有終身5,000石的俸祿。又於明治2年6月的戊辰戰爭中有功,明治天皇賞賜其4萬石祿。 明治5年6月21日逝世,他因長年喝酒導致腦溢血而辭世,享年46歲,過世後的一星期後,被追贈從一位,並葬在土佐藩下屋敷的大井公園(品川區東大井4丁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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