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Rites Controver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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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ký spor o obřady (čínsky v českém přepisu Ta-li-i, znaky 大禮議) v čínské říši Ming v letech 1521–1524 byl spor mezi císařem Ťia-ťingem a jeho velkými sekretáři podpořenými většinou úředníků o status císařových rodičů. Roku 1521 zemřel bezdětný císař Čeng-te, po něm nastoupil na trůn jeho bratranec Ťia-ťing. Velcí sekretáři a většina úředníků v čele s Jang Tching-cheem prosazovali adopci Ťia-ťinga císařem Chung-č’, aby se tak stal mladším bratrem svého předchůdce Čeng-tea. Ťia-ťing adopci odmítal a požadoval posmrtné udělení císařské hodnosti svým rodičům. Vleklý spor nakonec císař vyřešil odvoláním Jang Tching-chea, další odpůrci byli uvězněni, zbiti nebo vypovězeni do okrajových oblastí říš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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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礼の議(たいれいのぎ)は、明代に世宗嘉靖帝の実父である興献王朱祐杬の尊号を巡って起こった論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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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禮議是明朝嘉靖年间因明世宗欲為其生父兴献王朱祐杬追尊上号所引起的一场政治鬥争,發生於世宗登基不久之時。當時,世宗與楊廷和、毛澄為首的正德舊臣們之間發生矛盾。群臣認為世宗繼承了明武宗的帝位,理應以武宗之父明孝宗為尊,故要求世宗承認自己是過繼給孝宗,要認孝宗為嗣父,但世宗只認孝宗為伯父,故造成了以何者為世宗皇考(即宗法意义上的父親),以及世宗生父尊号的皇統問題发生了鬥爭。 大禮議歷時三年(1521年至1524年),以世宗施加皇權壓迫獲勝而告終。嘉靖十七年(1538年)九月,廷議追尊生父朱祐杬為睿宗献皇帝,祔於太廟,並改其陵墓名為顯陵。反對一方的官員被悉數削職致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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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Rites Controversy (simplified Chinese: 大礼议; traditional Chinese: 大禮議; pinyin: Dà Lǐ Yì) took place in the decade following 1524 in Ming China. It pitted the young and newly enthroned Jiajing Emperor against the Grand Secretary Yang Tinghe and the majority of the Confucian officials in his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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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의 의(大禮議)는 명나라 가정제가 1524년에 제위에 오른 이후, 내각대학사였던 양정화 등 조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관료들과 황제를 지지하는 관료 세력들이 가정제를 누구의 뒤를 이은 황제로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서로 대립한 사건이다. 이 문제는 단순한 칭호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제가 적장자의 혈통으로 황제의 위를 차지한 것인지, 아니면 방계의 혈통으로 황위에 오른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기에 유교가 사회의 주요 이념이었던 명나라 내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이후 이 갈등은 유교 학자들에 의해 풀리기 시작하는데, 이 젊은 학사들은 황제가 마음에도 없는 아버지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유교 원리와 인간의 심성을 거스르는 일이라며 황제의 편을 들었고, 결국 이는 황제파 관료들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정제는 '가문은 계승하지만 적통은 계승하지 않겠다.'라고 맞서며 그의 주장을 점차 강화시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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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ký spor o obř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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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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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禮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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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à Lǐ Y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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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禮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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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ký spor o obřady (čínsky v českém přepisu Ta-li-i, znaky 大禮議) v čínské říši Ming v letech 1521–1524 byl spor mezi císařem Ťia-ťingem a jeho velkými sekretáři podpořenými většinou úředníků o status císařových rodičů. Roku 1521 zemřel bezdětný císař Čeng-te, po něm nastoupil na trůn jeho bratranec Ťia-ťing. Velcí sekretáři a většina úředníků v čele s Jang Tching-cheem prosazovali adopci Ťia-ťinga císařem Chung-č’, aby se tak stal mladším bratrem svého předchůdce Čeng-tea. Ťia-ťing adopci odmítal a požadoval posmrtné udělení císařské hodnosti svým rodičům. Vleklý spor nakonec císař vyřešil odvoláním Jang Tching-chea, další odpůrci byli uvězněni, zbiti nebo vypovězeni do okrajových oblastí říš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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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Rites Controversy (simplified Chinese: 大礼议; traditional Chinese: 大禮議; pinyin: Dà Lǐ Yì) took place in the decade following 1524 in Ming China. It pitted the young and newly enthroned Jiajing Emperor against the Grand Secretary Yang Tinghe and the majority of the Confucian officials in his government. The Jiajing Emperor had succeeded his first cousin, the Zhengde Emperor after the latter died childless. His uncle, the Hongzhi Emperor, had not left any other surviving children either. In order to perform the proper rituals owed him according to tradition, it was necessary that the Jiajing Emperor be posthumously adopted by his late uncle who has been dead for nearly two decades. The Jiajing Emperor was reluctant to do this partly because he feared the influence of the Hongzhi Emperor's surviving wife, Empress Dowager Zhang. In this he had the support of his biological mother, who was angered by the prospect that her son could be removed from her by adoption. The conflict between the emperor backed by his mother and officialdom backed by the empress dowager was finally broken by memorials to the throne (namely, by newly qualified scholar-bureaucrats Zhang Cong and Gui E) arguing that rituals performed contrary to the emperor's own heart would be against human nature. Encouraged by this, gradually Emperor Jiajing fostered the idea of "ascending the clan but not the lineage" and grew more presumptuous. The core counter-argument to Emperor Jiajing's claim, supported by a large majority of court officials, had to do with the imperial treatment of the Zhengde Emperor and his widow Empress Xia. The couple together had passed the throne to their cousin instead of an adopted child of their own, in favor of their mother-in-law. As a matter of fact, Emperor Jiajing's grandfather Emperor Chenghua had other great-grandsons and this was brought up in the discussion of royal succession with the empress dowager, prior to summoning Emperor Jiajing to Beijing in her name. Emperor Jiajing decided to allow his own father Zhu Youyuan, the late Prince Xian of Xing, to be posthumously elevated to the status of emperor and particularly be granted seniority over Zhengde Emperor. Grand Secretary Yang Tinghe was forced into retirement; his son Yang Shen who led the counter-argument was sent to exile and nearly murdered on the way. By the end of Emperor Jiajing's one-sided settlement, enemies and dissenters at court were beaten (sometimes to death), imprisoned, or banished. According to the histories this marked the beginning of the young emperor's authoritarian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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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의 의(大禮議)는 명나라 가정제가 1524년에 제위에 오른 이후, 내각대학사였던 양정화 등 조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관료들과 황제를 지지하는 관료 세력들이 가정제를 누구의 뒤를 이은 황제로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서로 대립한 사건이다. 이 문제는 단순한 칭호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제가 적장자의 혈통으로 황제의 위를 차지한 것인지, 아니면 방계의 혈통으로 황위에 오른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기에 유교가 사회의 주요 이념이었던 명나라 내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가정제는 사촌이었던 정덕제가 후사 없이 사망한 이후 방계 황족으로서 황위에 올랐다. 그의 백부였던 홍치제 역시 그 어떤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기에, 종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가정제가 거의 20여년 전에 죽은 홍치제의 양자로 들어가야 하였다. 당시 내각대학사였던 양정화를 위시한 관리들은 가정제를 홍치제의 양자로 편입시키고, 홍치제를 '돌아가신 아버지'라는 뜻의 '황고'(皇考)라는 칭호를 붙일 것을 제안하고, 가정제의 친부였던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을 황숙부(皇叔父)로 칭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가정제는 이 제안을 전혀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가정제의 생모 또한 그녀의 아들을 당시 살아있던 홍치제의 아내 효성경황후 장씨에게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크게 반대하였다. 가정제는 오히려 홍치제를 황백부로, 친부인 흥헌왕을 황고라는 칭호를 붙일 것을 제안하며 조정이 반쪽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후 이 갈등은 유교 학자들에 의해 풀리기 시작하는데, 이 젊은 학사들은 황제가 마음에도 없는 아버지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유교 원리와 인간의 심성을 거스르는 일이라며 황제의 편을 들었고, 결국 이는 황제파 관료들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정제는 '가문은 계승하지만 적통은 계승하지 않겠다.'라고 맞서며 그의 주장을 점차 강화시켜나갔다. 최종적으로 가정제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흥헌왕을 예종 헌황제로 추존하였고, 거의 전 황제였던 정덕제보다도 그 격을 높여 대접하였다. 내각대학사였던 양정화 등 조정의 대신들은 사퇴를 강요당했고, 특히 가장 열성적으로 황제에게 반대 의견을 올렸던 양정화의 아들은 먼 곳으로 귀양을 갔으며, 귀양 도중 괴한의 습격으로 거의 죽을 뻔 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황제에 반대했던 신료들이 대거 쫓겨남에 따라 가정제의 권위적인 통치 방식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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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礼の議(たいれいのぎ)は、明代に世宗嘉靖帝の実父である興献王朱祐杬の尊号を巡って起こった論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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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禮議是明朝嘉靖年间因明世宗欲為其生父兴献王朱祐杬追尊上号所引起的一场政治鬥争,發生於世宗登基不久之時。當時,世宗與楊廷和、毛澄為首的正德舊臣們之間發生矛盾。群臣認為世宗繼承了明武宗的帝位,理應以武宗之父明孝宗為尊,故要求世宗承認自己是過繼給孝宗,要認孝宗為嗣父,但世宗只認孝宗為伯父,故造成了以何者為世宗皇考(即宗法意义上的父親),以及世宗生父尊号的皇統問題发生了鬥爭。 大禮議歷時三年(1521年至1524年),以世宗施加皇權壓迫獲勝而告終。嘉靖十七年(1538年)九月,廷議追尊生父朱祐杬為睿宗献皇帝,祔於太廟,並改其陵墓名為顯陵。反對一方的官員被悉數削職致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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